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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교계브리핑 - 황승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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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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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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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00년전 3.1운동 당시 1%에 불과했던 기독 애국인사들의 활동이 다양하게 연구되고, 또 알려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축소되거나 잘못 알려지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요. 오늘 주간교계브리핑 시간에는 3.1운동 당시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앵커: 한국성결신문 황승영 기자 나와 있습니다. 황 기자, 3.1운동에 기독교가 주도적으로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역할이 폄훼되거나 잘못 알려진 것이 있는데요, 실상 어떻습니까? 황기자 - 네, 3.1운동사에서 기독교에 대해 잘 못 알려진 내용이 꽤 있습니다. 대부분 역사의식이 결여되었거나 반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나온 주장이기는 하지만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삐뚤어진 역사가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한다는 취지서 몇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일부 역사학계와 언론에서 동학의 후예 천도교가 3.1운동을 이끌고 서학의 후신 기독교가 보조를 맞추어 3.1운동이 일어났다, 혹은 천도교에서 장로교, 감리교, 불교 설득하여 3.1운동을 일으켰다는 이 대표적인 사례인데요, 이는 사실과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3.1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상황만 본다면 천도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인들의 약 89%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는데, 기독교가 보조 역활을 했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3.1운동 준비 단계부터 주도적으로 동참했고, 전국 지방단위로 조직돼 있는 교회와 기독교학교가 지역 독립운동의 거점역할을 감당했기에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급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앵커 - 3.1운동은 누가 보더라도 종교인들이 앞장선 것인데, 기독교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통계나 수치상으로 나온 자료가 있으면 이해가 빠를 것 같은데요. 황기자 - 네, 3.1운동은 국내 기독교와 천도교 등 국내 종교세력과 해외 독립운동단체가 연합하여 일어난 민족 최대 운동이 분명한데요, 기독교와 천도교와 단순 비교를 해보면 기독교의 역할이 얼마나 켰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중에서 16명이 기독인이었는데요, 이들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분들이고, 당시 서명하지 않는 인사도 48명이 있는데 여기서도 기독교인이 24명으로 절반을 자치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전국적으로 340개소에서 중요한 만세시위가 있었는데요, 그중 기독교한 주도한 것은 78개소였고, 천도교와와 기독교가 연합한 곳이 42개소였습니다. 3.1운동 당일에 만세운동도 9곳이었는데, 7곳을 기독교인사가 주도했습니다. 이런 것만 비교해도 천도교보다 기독교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 3.1운동으로 인해 체포된 기독교인이 전체 투옥자 중 20%를 차지했는데요, 당시 기독교인 전체 인구에 1% 불과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이고, 천도교인보다 훨씬 많은 수입니다. 피해 역시 제암리교회 사건 등 교회와 기독교인이 훨씬 컸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3.1운동과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단체들, 가령 독립협회, 신민회, 대한인국민회, 2.8선언을 한 일본 YMCA, 상해 기독교회 등이 모두 기독교인이 주도적이었습니다. 이는 뭐 자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3.1운동과 독립운동에 관련한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앵커 - 이런 오해는 주한 선교사들에게도 있는데요, 당시 선교사들이 정교분리원칙에 따라 3.1운동과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다는 해석도 있는데 이것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거 아닙니까? 황기자 - 네 그렇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처음부터 정교분리를 주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정교분리를 헌법에 담아서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도 이같은 원칙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특정정치세력과 연합하거나 정치단체처럼 행동하는 것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워했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의 자격으로 정치에 참여하거나 3.1운동이나 독립운동에 나서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근대화에서 민주주의 정신을 가르친 사람이 서양 선교사들이었고, 이것이 3.1운동 정신에 반영되었습니다. 또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독교학교가 만세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했는데요, 만일 선교사들이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면 3.1운동에 기독교 참여는 불가능했을 거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외부적으로는 정교분리원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에서는 일제에 항의하고 3.1운동을 널리 해외에 알리는데 앞장섰다는 것이 교회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실제로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서방사회에 3.1운동을 알리는 중요한 활동을 했는데요, 이로 인해 일제의 잔혹한 통치 실상이 드러나게 되었고, 일제 통치에 대한 해외의 시각이 바뀌는데도 일조했습니다. 그리고 일제가 3.1만세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선교사들의 도움을 구했는데요, 그때 선교사들이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일제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당시 기독교도 정교분리 원칙과 반대로 3.1운동 준비단계서부터 만세운동, 이후 임시정부 등 국가수립 등에 적극 관여한 것을 보더라도 정교분리 원칙이 기독교의 3.1운동과 독립운동에 소홀하게 했다는 주장은 맞지 않습니다. 주한 선교사들도 결코 식민지 조선의 아픔과 독립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가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앵커 - 기미 독립선언서도 기독교인 지도자들이 검토하고 수정했다면서요? 황 기자 - 네 그렇다고 봐야합니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 최남선이고, 그가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기독교 지도자인 이상재 이승훈 박승봉 세 사람이 검토하고 교정한 것이라고 학계에서 알려졌습니다. 최남선도 "나는 기독교인들과 수시로 상종하는 동안에 자연히 기독교적인 사상을 갖게 된 것이 사실이다”며 “독립 자유 평등 및 정의와 같은 말이 다 기독교에서 나온 것인 만큼 나에게서 기독교를 빼고서는 나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장신대 임희국 장신대 교수는 “독립선언서의 작성에 참여한 사대부 출신 기독교지도자들은 당시 국제정세를 두루 파악했을 뿐 아니라 동양평화에 대한 이론도 탄탄히 갖추었는데, 그 평화사상은 기독교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사학자 이덕주 교수도 '3·1운동의 이념과 운동노선'에 관한 연구를 통해 14종의 독립선언서가 직·간접적으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이뤄졌으며 초기 선언서-기미독립선언서-들에 나타는 비폭력, 무저항, 평화 운동 노선의 확립에 기독교가 영향력을 주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교수도 "성서를 통해 정의 자유 독립과 평등의 이념을 체득한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신앙심의 민족의식을 강화시켰고 민족의식은 신앙심을 더 심화시켰다"고 밝혔습니다. 앵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은 3.1만세운동에서 기독교가 한 일이 뭐가 있느냐면서 민족대표 33인 중에 일본에 동조한 친일인사도 있지 안 느냐고 기독교 폄훼하는 이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봐야 할까요? 황 기자 - 네 그런 주장도 있는 것이 사실인데요, 기독교계 민족 대표 중에서 박희도 정춘수 목사는 확실히 변절했고, 평신도 이갑성은 의혹은 있으나 확증이 없다는 게 학계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견디다 못해 부역한 사람은 기독교 인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3.1운동 거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천도교 측 최린도 친일행위를 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도 배신을 했는데요, 몇몇 기독교 대표 민족지도자들의 친일행위를 내세워 한국 기독교 전체의 3.1만세운동을 부정하려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설사 일제 말 바람직하지 못한 길을 걸었다고 해도 3.1운동에 참여한 그 대의, 그 자세를 폄훼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입니다. 앵커 - 북한지역에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3.1운동을 주도적으로 벌였는데, 분단이라는 현실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면서요? 황 기자 - 네 그렇습니다. 사실 3.1만세 운동은 남한보다 북한지역이 더 활발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당일에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은 경기도 한성부, 오늘날 서울을 비롯해 전국 9곳에 동시다발로 일었나는 데요, 그중에서 7곳이 현재의 북한지역이었습니다. 특히, 북한지역은 대부분 주동자가 목사와 장로 등 기독교인이었으며, 교회의 조직과 인맥이 동원되었고, 교회가 3.1운동 확산의 주요 통로가 되었다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기독교인이 16명이라고 잘 알려져 있는데요, 이중 북한지역 인사가 절반이 넘는 9명이었습니다. 특히 의주에서는 민족대표 유여대 목사가 직접 독립선언식을 주도했고, 선천 평양 원산 해주는 3.1 민족대표를 배출했을 정도로 3.1운동의 영향력과 역할이 다른 지역보다 컸다고 보시면 됩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평양과 의주에서는 식순까지 준비한 가장 대표적인 독립선언식이었는데요, 그 식순이 기독교식었다는 것입니다. 평북 의주의 경우 찬미가, 찬송을 부르고, 독립을 비는 기도도 드리고, 이어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고 합니다. 평양에서도 당시 장로교 총회장 김선두 목사가 사회를 직접 맡았고, 산정현교회 강규찬 목사가 독립운동 연설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원산의 경우에도 장로교 감리교가 준비 단계부터 협력하여 단일한 시위를 이끌었고, 밴드가 앞장서서 행진곡을 연주하며 시위대를 이끌었다는 연구도 있었습니다. 앵커 - 네 북한지역에서 3.1운동이 더 활발하고 더 기독교적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운데요. 북한지역에 3.1운동 역사나 유적지를 발굴하거나 이 부분에 대해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황 기자- 네 그렇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감리교와 예장통합에서 3.1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 활동을 조사를 했는데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독립기념관이 북한의 3.1운동 사적지를 조사를 벌였는데, 기독교계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사적지도 100곳 가까이 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평양 일대에 있었던 장대현교회와 남산현교회, 로제타 홀 선교사가 세운 기홀병원 등이 3.1운동의 사적으로 평가받았고, 숭실하교, 숭덕학교, 숭현학교 등 기독교학교도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사학자들은 북한지역 교회의 3.1운동 관련 내용과 사적지는 현재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요, 앞으로 더 연구해야 과제입니다. 그런데 최근 범종교단체로 구성된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북한에 3·1운동 유적 조사를 비롯해 3·1운동 관련 남북 공동사업을 북한에 제안했습니다. 위원회는 지난 1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3월 1일 당일 남쪽에서는 서울에서만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데 비해 북쪽에서는 평양, 진남포, 함흥 등 7곳에서 일어날 만큼 거셌으나 유적 등의 조사가 남녘보다 미흡해 체계적인 공동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혀 향후 활동이 기대가 됩니다. 앵커: 100년 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민족의 아픔 현실을 결코 외면하지 않고 의연히 일어났죠? 이러한 사실들이 축소되고 왜곡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은데요. 아무쪼록 3.1만세운동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 한국교회의 역할과 활동이 바르게 전해질 수 있길 바라야겠습니다. 황승영 기자 수고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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